마니산 정수사


사찰소개

함허대사

마니산 정수사


향토유적 제19호 함허대사 부도탑
함허당 기화(涵虛堂己和)스님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배불(背佛)의 풍조 속에서 정법을 수호하고 오해와 무지를 없애기 위해 크게 노력한 분이다. 그의 부도가 이 곳 정수사에 있는가 하면 이 절 앞의 계곡은 그의 당호를 빌려 함허동천 계곡이라 불리고 있으니 정수사에는 함허스님의 얼이 곳곳에 스며있다고 하겠다.
함허스님이 출세했던 시대는 고려왕조와 조선왕조가 교체되는 격동기였으며, 사상적으로도 국가의 지도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게 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함허스님은 감정적, 대립적인 차원에서 해결이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교단 존립의 정당성을 합리적인 차원에서 천명함으로써 유학자의 그릇된 불교비판에 세찬 죽비를 가하였다.
함허스님은 고려말인 1376년(우왕 2)에 충청도 중원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수이(守伊)이고 호는 무준(無準)이었다. 출가후 법명을 기화, 호를 득통이라 하였으며, 그가 주석 했던 자모산에서는 당호를 함허당(涵虛堂)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주역>에 침잠하는 등 전통적 유학수업을 충실히 하였으나 함께 수학하던 성균관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과 육신의 허망함을 깨닫고, 21세에 관악산 의상암으로 출가하였다. 이듬해에 회암사로 가서 왕사였던 무학자초(無學自超)를 친경하여 법요를 듣고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용맹정진으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그는 여러 지역에 주석하며 중생교화를 위해 <금강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사찰을 중수하는 등 수행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힘쓰며 조사의 가풍을 널리 떨쳤다.
그러나 1431년(세종 13) 겨울 노구를 이끌고 봉암사에 들어가 쇠락한 절을 수리하고 선풍을 진작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2년 후 4월 어느 봄날 허허롭게 고요함에 들었다. 다비후 사리를 모아 그가 오랫동안 주석 했던 이 정수사를 포함하여 인봉사 · 현등사 · 봉암사 등 네 곳에 부도를 세워 그 덕화를 가리도록 하였다.
<유적지론 2권> 기화의 생애는 수행과 교화뿐만 아니라 많은 저술로도 설명되어질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로는 <금강경오가해설의>2권, <현정론>1권, 그리고 <함허득통화상어록> 1권이 있다. <현정론>은 유학자의 그릇된 배불론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한 호불론서이며, <유석질의론> 또한 배불에 대한 반론서로서 일종의 불교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강경오가해설의〉에서는 그의 치밀하고 깊은 선사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밖에 불가(佛家)에서 반드시 읽히는 <원각경>·<법화경>· <선종영가집> 등의 대승경전에 주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스님은 선과 교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쇠락한 불교계의 중흥을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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